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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 장영실

    과학자 장영실

    •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 매일 강무(講武)할 때에는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
    • 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 -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귀화인 아버지를 둔 동래현의 노비
    조선조 세종대왕 시대는 훈민정음의 창제와 함께 우리의 과학기술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운 시기였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 정교한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 앙부일구, 천문 관측기구인 혼천의 등은 당시의 뛰어난 과학기술이 낳은 결실이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이들 과학기술제품 대부분에는 장영실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어 장영실이야말로 세종대왕의 의지를 실현시켰던 일등공신 중의 한 명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인이었지만, 정작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장영실이 어떻게 출생하여 성장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官奴), 즉 노비였다.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의 부친은 원(元)나라 사람으로 소주(蘇州)·항주(杭州)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한다.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손재주가 뛰어났던 장영실은 어린 나이에 관기였던 어머니 대신 동래현의 노비가 된다. 장영실, 그는 후에 우리 민족이 낳은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자 중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반상(班常)의 구분이 뚜렷했던 당시 천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일약 종3품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출신은 비천했으나, 뛰어난 재주로 승승장구하다
    관청의 노비로 있으면서 1400년 영남지방에 가뭄이 들자 강물을 끌어들여 가뭄을 이겨내게 한 장영실은 그 공로로 동래 현감으로부터 상을 받고 그 후 세종이 전국에 인재를 모으자 동래 현감의 추천을 받아 입궐하게 된다. 대궐에서 그가 처음 일했던 곳은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鑄字所)였다. 이곳에서 장영실은 많은 논란을 뒤로하고 세종의 인정을 받아 1423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대궐의 일용품을 관리하는 정5품 벼슬인 상의원 별좌라는 벼슬에 오르게 된다.
    이후에도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는데 이때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황희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이때부터 장영실은 종3품 상호군 벼슬에 이르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숱한 과학기술의 업적을 이룩해냈다.
    출쏟아지듯 만들어진 당대 최고수준의 과학기술 업적
    장영실이 처음 만들었던 과학기기는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인데 이 간의로 잰 당시의 한양이 북위 38도 부근으로 밝혀져 정확한 측정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장영실은 이어 이천, 정철등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33년 간의를 더욱 발전시킨 혼천의(渾天儀)를 완성시킨다. 그 공으로 정4품인 호군벼슬로 승진하여 자동물시계를 연구하기 위해 명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후, 1434년 정교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완성시켰다.
    자격루는 물시계에다 정밀한 기계장치를 결합, 때가 되면 인형과 징북종을 이용, 시각과 청각을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로 장영실이 아니면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시계였다. 자격루가 망가졌어도 그가 죽은 후 고칠 만한 사람이 없어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다가 100년 후인 1534년에야 복원됐다는 사실이 그 정밀성을 입증해 준다.
    장영실이 만들었던 또 다른 걸작은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일성정시의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옥루(玉漏)등을 꼽을 수 있다.
    장영실은 1442년 세계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냈다. 서양에서 카스텔리가 1639년 만든 측우기보다 2백년이나 앞서 만들어졌던 이 측우기는 강우량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의 크기, 빗방울이 떨어질 때 생기는 오차까지 고려해 만든 과학적인 것으로 현재 WMO(세계기상기구)가 정한 측정오차에도 합격할 만큼뛰어난 업적이었다.
    장영실은 또 한강과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제작, 측우기와 함께 당시 농업기상학의 전기를 마련했다.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사라진15세기 최고의 공학자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거의 20년간에 걸친 그의 극적인 공적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다. 출신 배경도 의문이지만, 그간 세종의 남다른 관심과 장영실의 재주 등을 고려해볼 때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1442년에 대호군 자리에서 파면된 이후로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1442년(세종 24년)에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장영실의 임무는 제작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곤장까지 맞아야 한다고 했으며, 그것이 과학자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노비이면서 뛰어난 과학기술자였던 장영실을 발탁한 세종대왕, 그의 의지를 실현시킨 장영실, 이 두 인물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과학기술문화를 꽃피운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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