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 영실에 관한 기록은 거의 20년간에 걸친 그의 극적인 공적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다. 출신 배경도 의문이지만, 그간 세종의 남다른 관심과 장영실의 재주 등을 고려해볼 때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1442년에 대호군 자리에서 파면된 이후로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1442년(세종 24년)에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장영실의 임무는 제작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곤장까지 맞아야 한다고 했으며, 그것이 과학자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 노비이면서 뛰어난 과학기술자였던 장영실을 발탁한 세종대왕, 그의 의지를 실현시킨 장영실, 이 두 인물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과학기술문화를 꽃피운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